수만 백성을 구해낸 낮은 토성, 용인 남사읍 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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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만 백성을 구해낸 낮은 토성, 용인 남사읍 처인성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기자말>어느 시대건 민중이 주역이 아닌 역사는 없다. 이 명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한다. 특히 위급에 처하면 그 진가가 제대로 드러난다. 천대나 멸시와는 별개 명제다.성곽이라 부르기도 어색하다. 낮고 하찮아 보이는 성벽에 오르니, 공기처럼 잊고 지낸 저 말이 뇌리를 두드린다. 흙으로 쌓은 처인성이 꼭 그들 같아서다. 향·소·부곡(鄕·所·部曲)의 하나였으니, 발가락의 때만큼이나 취급했을까.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 한 무슨 울림이나 있었겠는가? 천대를 천형처럼 이고 살았을 터다. 하지만 당시 그곳엔 현명한 승려가 있었다. 그로 인해 성벽은 무디지 않았고 민중은 날카로웠다. ▲ 용인(팔도군현지도)붉은 점이 용인 읍치. 그 아래 고현(현내면), 도촌면, 서촌면, 남촌면이 합쳐져 현재의 '남사읍'이 되었다. 남쪽 4개면을 합했다는 의미다. 고현의 창고 자리를 현재의 '처인성'으로 추정한다.ⓒ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13세기는 정복과 말살, 창조와 융합의 시대였다. 아시아대륙 한복판 초원에서 나타난 비정한 정복자의 말발굽이 이뤄낸 정반합이었다. 칼날은 비정했고, 그들이 일으킨 흙먼지는 동서양의 거리를 급격하게 단축해 버렸다. 말굽과 칼끝이 가닿는 데까지 광풍처럼 피바람이 휩쓸어 갔다. 그 폐허에서 새로운 생각과 도구, 문화가 다시 피어났다.고려도 마찬가지다. 1231년 8월 칸을 대신해 '살리타'가 몽골 군대를 끌고 고려를 침공한다. 1차 침공이다. 귀주성 등 강한 항쟁에도, 개경이 고립되니 몽골이 강요한 항복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충주에 이르기까지 약탈당하고 난 12월이다. 살리타는 72명의 다루가치를 남겨 정복지 관리를 맡기고 이듬해 정월 철군한다.집권자는 허수아비 왕이 아닌 무신정권이다. 최충헌의 아들 최우다. 다루가치를 모두 죽인다. 권력에 집착한 이들이 내린 결론은 강화도 천도다. 해석이 분분하다. 자주성과 정통성을 지켰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들의 근본은 착취자였다. 강화도로 들어가 맨 처음 손댄 일이 이를 뒷받침한다. 성벽이나 무기 마련이 먼저가 아니었다. 궁궐이다. 잣과 소나무수만 백성을 구해낸 낮은 토성, 용인 남사읍 처인성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기자말>어느 시대건 민중이 주역이 아닌 역사는 없다. 이 명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한다. 특히 위급에 처하면 그 진가가 제대로 드러난다. 천대나 멸시와는 별개 명제다.성곽이라 부르기도 어색하다. 낮고 하찮아 보이는 성벽에 오르니, 공기처럼 잊고 지낸 저 말이 뇌리를 두드린다. 흙으로 쌓은 처인성이 꼭 그들 같아서다. 향·소·부곡(鄕·所·部曲)의 하나였으니, 발가락의 때만큼이나 취급했을까.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 한 무슨 울림이나 있었겠는가? 천대를 천형처럼 이고 살았을 터다. 하지만 당시 그곳엔 현명한 승려가 있었다. 그로 인해 성벽은 무디지 않았고 민중은 날카로웠다. ▲ 용인(팔도군현지도)붉은 점이 용인 읍치. 그 아래 고현(현내면), 도촌면, 서촌면, 남촌면이 합쳐져 현재의 '남사읍'이 되었다. 남쪽 4개면을 합했다는 의미다. 고현의 창고 자리를 현재의 '처인성'으로 추정한다.ⓒ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13세기는 정복과 말살, 창조와 융합의 시대였다. 아시아대륙 한복판 초원에서 나타난 비정한 정복자의 말발굽이 이뤄낸 정반합이었다. 칼날은 비정했고, 그들이 일으킨 흙먼지는 동서양의 거리를 급격하게 단축해 버렸다. 말굽과 칼끝이 가닿는 데까지 광풍처럼 피바람이 휩쓸어 갔다. 그 폐허에서 새로운 생각과 도구, 문화가 다시 피어났다.고려도 마찬가지다. 1231년 8월 칸을 대신해 '살리타'가 몽골 군대를 끌고 고려를 침공한다. 1차 침공이다. 귀주성 등 강한 항쟁에도, 개경이 고립되니 몽골이 강요한 항복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충주에 이르기까지 약탈당하고 난 12월이다. 살리타는 72명의 다루가치를 남겨 정복지 관리를 맡기고 이듬해 정월 철군한다.집권자는 허수아비 왕이 아닌 무신정권이다. 최충헌의 아들 최우다. 다루가치를 모두 죽인다. 권력에 집착한 이들이 내린 결론은 강화도 천도다. 해석이 분분하다. 자주성과 정통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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